"막시미인~ 막시민~."
도토리 빌라는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루시안은 아침댓바람부터 막시민의 방안으로 뛰어들어가 '엄청 어려운 막시민 깨우기-by조슈아'를 실행하던 중이었다. 끈질기게 달라붙은 결과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아서 막시민은 어렴풋이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날 깨우려면 엘소 금화 한 개..."
"응? 금화? 줄게! 그러니까 일어나봐~"
그러니까 막시민은 이 노란 병아리 때문에 아침부터 기분이 매우 나쁜 상태였다.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아 진짜, 쓸데없이 돈만 많아가지고... 너 말이야, 엘소 금화 한 개면 뭘 할 수 있는 줄 알아?"
"우음..."
루시안은 보리스를 흘끔 쳐다보았지만 보리스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엘소 금화 한 개면 널 깨울 수 있겠지! 그러니까 잠깐만 일어나봐~"
결국 막시민은 폭발하고 말았다.
"아 진짜! 수업도 열시부턴데 왜 벌써부터 꺠우냐고! 그냥 날 좀 내버려둬!"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응? 그러니까... 어제도 대답 안해줬잖아!"
"그러니까 안한다고!"
"안돼! 난 꼭 들어보고 싶단 말이야!"
르노아의 날 아침, 빌라에서 딩가딩가 놀고 있던 소공작을 본 루시안은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더니 괴상한 비명을 한껏 질렀다. 그리고는 조슈아를 탈탈 털어가며 어디 갔었냐, 뭘 하다가 이제 오느냐, 언제 온거냐, 왜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지느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느냐, 그러고 보니 막시민은 어디 있느냐, 뭘 했길래 옷차림이 이 모양이냐, 아침은 먹었느냐, 왜 자기는 안 깨운거냐 등등을 물었다. 조슈아는 루시안에게 어깨를 붙잡혀 사정없이 흔들리며 빈혈을 경험하다가 간신히 화제를 돌려 루시안의 주의를 끌었다. 그 결과로 조슈아가 당했어야 할 일을 대신 겪고 있는 막시민이었다.
"도대체가...! 어떤 쓸모 없는 자식이 그런 걸 알려줘가지고! 너냐!"
막시민이 광분한 상태로 보리스를 마구 삿대질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냉담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 막군, 벌써 일어난거야?"
조슈아는 이른 아침인데도 교복까지 다 입고 있었다. 막시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정신상태 이상한 놈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도 난 그런거 안한다고! 날 봐! 그런게 어울릴 것 같냐!"
"아냐! 조슈아 똑똑해! 그리고 조슈아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리가 없단 말이야!"
조슈아는 보리스 곁으로 다가와 섰다. 이 모든 소란의 주동자인 주제에 정말 해맑은 얼굴이었다.
"막군이 이 시간에 다 일어나고~ 정말 대단한데. 루시안이 다시 보여."
"..."
보리스는 조슈아를 잠깐 보다가 한숨을 쉬더니 옥신각신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들 하는게 어때. 슬슬 아침식사 시간이고."
"앗, 그러냐? 식사는 중요하지. 난 간다."
막시민은 이때다 싶어 잽싸게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안경을 낚아채더니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거실을 빠져나갔다. 루시안이 놓칠세라 그 뒤를 따랐고, 조슈아도 싱긋 웃더니 두 사람을 쫓아 나갔다. 아무도 없는 빌라에서 보리스는 피곤한 듯 잠깐 한숨을 쉬더니 세 사람의 보모 역할을 하러 마저 떠났다.
***
"막군~ 막군, 막.시.민~"
"막시민~ 막시미인~"
교실에 들어와서도 막시민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루시안에 이어 이젠 조슈아까지 그를 흔들며 징징거리기 시작하니 짜증이 배가 되었다. 게다가 왠일인지 보리스까지 이 상황을 좀처럼 정리하려 들지를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말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루시안 때문에 아침잠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해 불만이었던 막시민은 교실에 들어와 책상에 누워서도 두 사람의 방해를 받자 전부 다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조슈아는 왠지 목이 졸려도 헤헤거릴 것 같고, 루시안의 목을 졸랐다간 숯가마가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 둘 다 못할 노릇이었다.
"늬들은 흔들어라~ 나는 잘테니~ 음냐..."
특히 루시안이 복병이었다. 저 녀석은 아무래도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분명히 안한다고 대답을 했는데 자기는 꼭 들어야겠다며 계속 조르더니 안 한다고 하면 계속 조르고, 거기에 또 안한다고 친절히 대답해주면 또 조르고... 이거야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루시안이 막시민을 조르느라 고군분투하거나 포기하려는 기색을 보이면 조슈아가 슬쩍 끼어들어 저 병아리를 부채질하니, 루시안은 꼭 무한동력처럼 끈질기게 졸라대기만 했다. 보리스에게 구조 요청의 눈빛을 보내도 소용없었다. 보리스조차 측은한 눈빛이었다.
"막시미인~ 한번만 들려줘어~"
"막군~ 나도 한번만~"
결국 무시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개가 짖네, 하고 무시하면 언젠가는 저 병아리도 지칠 때가 올테고, 그쯤 되면 든든한 지원군을 잃어버린 조슈아도 대충은 단념하겠지. 막시민은 슬슬 오기가 올라 니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심정이었다.
"...쳇, 안되겠어. 우리 작전을 다시 짜자."
예상은 적중해서, 막시민이 완전히 무시하자 루시안과 조슈아는 머리를 맞대고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학생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조슈아는 루시안과 쑥덕거리는 와중에도 가끔씩 강의실 문 앞쪽을 힐끔거렸다. 이윽고 백금빛 머리카락이 교실 입구 언저리에 보이자 그는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티치엘! 여기야, 여기!"
도토리 군단이 한 자리에 모이자 다른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티치엘은 그에 개의치 않고 활짝 웃으며 막시민에게 다가와 말했다.
"막시민, 바이올린 연주한다며? 언제 해? 나도 들어볼래!"
다 알고 왔다는 어투에 책상에 엎드려있던 막시민이 잠시 움찔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루시안이나 조슈아같이 티치엘도 적당히 무시하면 되겠지, 하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으악! 야! 이거 안 놔!"
티치엘은 막시민을 공중에 띄워버렸다. 그것도 거꾸로.
"조슈아가 협박도 서슴지 말라고 했거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들려주는 거지? 그렇다고 하면 내려줄게."
"으아으, 이 닭뼈같은 자식! 좌우지간 내 인생에 도움이 전혀 안 돼! 아무데서나 뒈져버리게 진작 내버려뒀어야 하는건데!"
"와, 막군 욕 패턴이 새로워졌어.'뒈져버리다'라니... 연극에서나 쓰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이 썩어빠진 거머리같은 자식! 해파리 촉수같은 자식! 닭 쫓던 개 같은 자식! 으아으!"
막시민은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채로 한동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슈아는 몇 번 봤던터라 아무 생각없이 막시민의 새로운 욕 패턴을 발견하며 경탄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학생들은 아니었다.
"우아아... 막시민을 공중에 띄웠어! 그것도 거꾸로! 저런 것도 마법인가?"
"...공중에 거꾸로 매달렸는데도 말은 잘 하네."
막시민이 욕을 멈출 생각을 않자, 결국 조슈아가 나서서 협상을 시도했다.
"좋아.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뭐가 필요한데? 너의 신성한 노동에 대가를 지불하겠어."
"신성한 노동은 개뿔! 너! 내려가면 걸레자루든 쟁기자루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얻어 터질 줄 알아! 아노마라드 끝까지 쫓아가서 때려줄테다!"
"돈이 필요해? 아니면 무언가의 면제권? 말만 해. 다 줄테니까."
"애초부터 말이 안된다고! 난 안할거야! 그러니까 이것 좀 내려!"
피가 쏠리는지 막시민의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티치엘의 얼굴에 언뜻 걱정하는 빛이 어리자 조슈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려주지 마, 티치엘."
"...이 악마야!"
"그런 건 이미 알고있지 않아?"
막시민은 조슈아를 매섭게 노려봤다. 안경이 이마 언저리에서 달랑거리느라 초점이 안 맞을텐데도 눈빛만은 형형히 살아있었다. 막시민은 재빨리 자신의 처지를 계산해 보았다. 교수가 들어오면 내려주기야 하겠지만, 교수가 들어오려면 아직 삼십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삼십분동안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채로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는 없었다. 이미 강의실에 들어와있는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막시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요구를 덥썩 받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 빌어먹을 바이올린은 한 곡 켜기도 힘든데 저렇게 각자 한곡씩 요구하면 자그마치... 그런 어마어마한 노동은 절대 사절이었다. 그런 생고생은 노을섬에서 이미 충분히 하고 왔다고!
"으아윽! 짜증나!"
막시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채로 고민만 하고 있자, 뜻밖에도 루시안이 나섰다.
"저기, 막시민, 혹시 돈이 필요한거야? 돈이라면 낼게! 원하는 대로 줄 수 있어!"
막시민은 눈을 흘겼다. 하지만 루시안은 별로 상관않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있지, 그거 세상에 몇 대 없는 귀한 바이올린이라고 조슈아가 그랬거든. 나, 음악은 잘 모르지만 그런거라면 충분히 희소성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희소성이 있는 것엔 돈 쓰는걸 주저하지 말아야 한댔어. 그러니까 부르는게 값이라는 뜻이야. 얼마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음... 내가 실버스컬 때 보리스에게 걸었던 것 만큼은 될까?"
말이 끝나자마자 조슈아가 순간적으로 질문했다.
"보리스한테 얼마를 걸었는데?"
"오만 엘소."
조슈아가 흘끗 돌아보니 막시민은 거의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조슈아는 친절하게도 막시민이 충격에서 헤어나올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자신의 제안을 내놓았다.
"나에 대해 말하자면, 앞으로 한 달 정도 네 옆에서 사라져줄게. 네가 원하지 않으면 멋대로 도토리 빌라에 찾아가는 일도 없을 거야. 어때?"
"...미친 놈. 그러다가 한 달 뒤에 시체로 나타나게?"
막시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태까지의 제안들이 꽤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막시민은 보리스를 쳐다보았다. 보리스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나는 너한테 줄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데... 따위의 변명을 하려던 찰나, 막시민이 선수를 쳤다.
"숯가마 너는 병아리 자식을 한달동안 내 눈앞에서 치워놔라."
"..."
보리스의 표정이 정말 볼 만 했다.
"어, 막군, 그런 하는거야?"
"아직 한다고 안했거든!"
막시민은 여태까지 제안받았던 것들과 어마무시한 노동을 머릿속 저울에 달아놓고 이렇게 저렇게 기울여봤다. 그러나 그를 결정적으로 설득한 것은 바로 티치엘이었다.
"그럼 나도 한달 동안 숙제 안 내줄게."
"..."
막시민의 얼굴에 기쁨인지 괴로움인지 모를 괴상한 표정이 나타나자 조슈아는 웃으며 말했다.
"막군이 하겠대. 그럼 난 포도원에 갈게. 티치엘, 내려줘."
쿵, 막시민은 내려오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한 손에 걸레자루를 집어들고 조슈아를 잡으러 뛰쳐나갔으나 조슈아는 이미 바람처럼 사라진 뒤였다.
***
"첫째, 한 사람당 요구할 수 있는 곡은 한 곡씩. 어려운 거 가져오면 죽는다."
"나! 질문! 조 바뀌고 샵이랑 플랫 많이 붙어 있고 프릴 화려하고 이런 거 가져오면 안 돼?"
"시끄러. 넌 니가 작곡하지 말고 원래 있던 걸로 가져와라. 조 변화 없는 걸로. 샵이나 플랫은 세 개 미만으로 붙어있는 걸로. 프릴 따위는 없애버려. 사분의 삼박자. 사분의 사박자까지는 허용해주지."
"...쳇."
도토리 빌라에 있는 네 개의 녹색 벨벳 의자엔 루시안, 보리스, 조슈아, 티치엘이 앉아 있었다. 막시민은 선 채로 벽난로 앞을 왔다갔다하며 연주회 규칙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아주 자세히.
"둘째, 시간은 내 맘대로 정한다. 닷새 뒤 내 공강 시간."
"닷새 뒤 공강 시간이면...? 어, 질문, 질문! 나랑 티치엘은 그 시간에 음률 수업 있는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저건 수업을 빼먹고 오라는 소리야, 루시안."
보리스의 설명에 티치엘이 잠시 움찔했지만 딱히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시안은 수업을 빼먹고 오라는 말에 더 신이 났다. 공식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어쨌든 수업을 빠질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생긴 것이다. 막시민은 단순무식한 룸메이트에게 혀를 끌끌 차며 다음 규칙을 읊었다.
"셋째, 악보는 내일까지 구해와라. 내일 지나면 안 받아."
그 말에 조슈아가 보리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찬트를 고치는 건데 하루는 짧을 것 같다는 생각에 반론을 제기하려던 찰나, 보리스가 먼저 손을 들었다.
"내일까지는 너무 짧은데."
"...? 너도 가져오게?"
막시민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보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시안을 치워 놓으라며. 나도 대가는 받아야지."
"..."
조슈아가 조용히 감탄하자 막시민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뭐, 좋아. 그럼 내일 모레까지. 불만 없지?"
"..."
"닷새 전까지만 내면 되는거 아냐? 왜 그렇게 촉박해?"
조슈아의 질문에 막시민이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연습을 해야 될 거 아냐!"
"..."
막시민은 다시 목을 가다듬고 나머지를 읊었다.
"넷째는 각자가 약속한 거 잊지 말라는 당연한 이야기고... 자, 그럼 마지막."
네 사람의 눈이 갈색 머리 소년에게 꽂혔다. 막시민의 다음 말은 매우 진지했다.
"앵콜은 없다."
그 날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조 변화는 없으며 샵과 플랫은 세 개 미만으로 붙어있고 프릴은 하나도 붙어있지 않으며 사분의 삼박자이거나 사분의 사박자인 '아주 쉬운 바이올린 솔로곡'을 찾으러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나마 조슈아는 자신의 음악적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곡은 절대 막시민에게 주지 않겠다며 악보 찾는 일을 중도포기하고 작곡에 돌입했고, 루시안은 이틀 내내 티치엘과 함께 도서관 한 구석에 쳐박혀 악보를 한 뭉치씩 쌓아놓고 뒤적였다.
"으아아- 나 이제부터 음악가들 매우 존경할거야. 특히 바이올린 연주자들. 까만 콩나물 대가리들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 눈알이 빠질 것 같아."
"조건에 맞는 곡은 너무 지루하고, 재밌을 만 하면 조건에 안 맞네. 휴."
설상가상으로 교수들이 내주는 과제까지 마쳐야 했던 지라 도토리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반면 막시민은 천하태평하게 빌라 거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과제 따위는 내 알 바 아니고- 티치엘 숙제도 없고- 조군 놈도 안 보이고, 빌라엔 아무도 없고- 아, 좋네. 매일 이래라."
"...아무도 없는 건 아닌데."
바로 옆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오자 막시민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뭐냐, 넌? 기척 숨기기가 특기냐? 좀 소리내면서 들어오라고."
"아까부터 여기 있었는데."
막시민은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근데 넌 왜 별로 안 바빠 보이냐? 다른 놈들은 엄청 바쁘던데."
"...뭐,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는 거지."
보리스치고는 꽤나 유연한 대답이었다. 막시민이 놀랍다는 듯 눈을 흘기자 보리스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조슈아는 곡 쓰고 있던데."
"조건 아니까 알아서 쉽게 써오겠지."
"..."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보리스였다. 그러나 보리스는 막시민의 이어진 다음 말에 더 당황했다.
"너도 곡 쓰냐?"
"..."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멍청한 것들."
그러더니 막시민은 누워있던 몸을 발딱 일으켜 앉았따.
"너, 그거 찬트지?"
"..."
"마력 잘 짜넣으라고. 내가 이걸로 네 소절짜리 신성찬트 한 번 연주했다가 바닷물에 비명횡사할 뻔했어."
"...그런 큰 힘은 아니니 걱정 마."
"아예 새로 쓰는거야, 아님 뭐 또 뜯어고치는 거야?"
"적당히 하고 있어."
막시민은 얼굴을 구기면서 눈썹을 마구 일그러뜨렸다. 그러더니 다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너도 날짜 지켜라. 지나면 안 받아."
거실 바닥에 누운 막시민은 그대로 쿨쿨 잠들어버렸다.
***
"...막시민?"
도토리 빌라 문이 빼꼼 열리면서 닷새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던 소공작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빌라엔 보리스밖에 없었다.
"...조슈아."
"아, 보리스. 막군은?"
"방에 있어. 들어오지 말라던데."
방 너머로 바이올린 활 스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조슈아는 싱긋 웃더니 의자에 앉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조슈아는 작은 목소리로 보리스에게 물었다.
"다 끝났어?"
"...응."
"...그래, 아무것도 말하지 마."
묘한 대답에 보리스가 조슈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슈아도 보리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실은, 막군이 예전에 네 소절짜리 신성찬트를 연주하다가 집채만한 파도가 덮쳐와서...!"
"그런 큰 힘은 아니니 걱정 마."
보리스가 단칼에 안심시켜주자 조슈아는 호르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있으니 루시안이 티치엘과 함께 빌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정말 음악회라도 온 듯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고 조슈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야, 그 옷은?"
"연주회잖아! 이런게 드레스코드라던데. 티치엘이 그랬어."
루시안은 하얀색 수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모양새가 언뜻 보니 정말 도련님처럼 보였다. 티치엘도 평소 입던 하얀 치마가 아닌 파란색 새틴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차분한 금발과 의외로 잘 어울렸다. 보리스는 간만에 애 티를 벗은 루시안이 신기한 듯 그저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조슈아도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 그런데 막군은 그런거 싫어할텐데..."
"그래서 막시민은 한 벌 선물로 주려고! 그리고 여기! 보리스 것도 사왔어!"
루시안이 해맑게 웃으며 종이가방 두 개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조슈아는 갑자기 막시민이 불쌍해졌다.
"조슈아는 내가 마법으로 바꿔줄게!"
티치엘이 호기롭게 말하자 조슈아는 극구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아, 아냐. 난.. 음... 옷 많으니까 위층에 가서 아무거나 갈아입고 올게."
옥신각신한 끝에 결국 조슈아는 위층으로 도망쳤고, 옷장에서 연미복 한 벌을 아무거나 집어 입고 왔다. 그 사이 보리스는 루시안이 사온 까만 정장으로 갈아입었는데, 루시안의 흰 색 정장과 대비되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고마워."
"별 것 아닌 걸! 티치엘이 많이 도와줬어."
네 사람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보니 곧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방 안에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막바지 연습을 하던 막시민은 정확한 시간에 초췌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괴상한 차림새를 한-그의 기준에서-네 사람과 거실에서 마주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뭐냐, 너희?"
막시민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조슈아를 쳐다보았지만 조슈아는 당황하며 부인했다.
"나 아냐."
"막시민! 선물이야!"
그 때 루시안이 종이가방 하나를 막시민에게 건넸고, 얼떨떨하게 받아든 막시민은 내용물을 보자 더 얼떨떨해졌다.
"...옷? 고작 다섯명짜리 연주회에 격식 따지냐?"
"고작이라니! 다섯 명 씩이나 되는 걸!"
루시안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이자 막시민은 어차피 공짜인데다 더 이상 논쟁하기도 귀찮은 듯 고분고분 말을 들었고, 연주회에 앞서 먼저 수납이 시작되었다.
"병아리, 돈."
"아, 그거 집에 편지 부쳐서 하인들한테 가져오라고..."
"그럼 어음 써라. 다음, 세 명은 여기다 지장 찍어."
막시민이 내민 종이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 티치엘 쥬스피앙은 막시민 리프크네에게 상기일로부터 한달동안 숙제를 내주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인) 나, 조슈아 폰 아르님은 막시민 리프크네 앞에 상기일로부터 한달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인) 나, 보리스 진네만은 막시민 리프크네 앞에 상기일로부터 한달동안 루시안 칼츠를 나타나지 않게 할 것을 약속한다. (인) 992년 1월 20일 막시민 리프크네 씀. |
"...철저하네."
조슈아가 싱긋 웃으며 제일 먼저 엄지도장을 찍었고, 티치엘과 보리스가 차례차례 마저 찍었다. 그 사이 루시안도 어음을 완성했다. 그 후, 드디어 모두가 고대해 마지 않았던 바이올린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후우."
막시민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더니 어깨에 바이올린을 얹었다. 낑낑거리던 바이올린의 현들이 곧 가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첫 곡은 미뉴에트 풍의 가벼운 왈츠였다. 티치엘이 가져온 악보였는데, 흥겨운 리듬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마치 마법처럼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티치엘처럼 따스한 봄바람이었다. 조슈아의 머릿속엔 아주 또렷한 영상이 떠올랐다. 너른 들판에 하얀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따스한 봄바람에 들판의 풀들이 한 쪽으로 누워 있었다. 머나먼 곳에는 파도가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백사장에 부서지고 있었고, 바다와 모래가 만나는 곳에는 맨발의 소녀가 총총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조슈아는 음악의 마력에 금방 동화되어 곧 의자를 까딱거리며 멜로디를 흥얼거렸고, 티치엘도 기분이 좋아진 듯 뺨이 발그레해졌다. 동네 어린 아이들도 쉽게 따라할 수 있을만큼 쉬운 멜로디인지라 연주는 금방 끝이 났다. 첫 곡의 여운이 가볍게 남았다.
"...아, 벌써 끝이야? 아쉽네."
"있지, 나 되게 따뜻한 기분이 들었어. 이거 마법이야?"
"...그런 것 같군."
"막시민, 잘했어! 역시 가르치면 잘하는구나~"
티치엘의 솔직한 감상평에 막시민이 잠시 움찔했지만 작게 한숨을 내쉴 뿐 별달리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두번째 곡이 시작되었다. 첫 소절이 시작되자마자 누가 가져온 곡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엔 모두가 구체적인 영상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한적한 강가에서 금발머리 꼬마아이가 물장구를 치며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작살을 던지며 한참을 뛰어놀다가 저녁이 되어 모닥불을 피워놓고 물고기 스프를 끓여 먹었다. 밤에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의 별을 세고 웃음과 함께 잠들었다. 루시안처럼 밝고 경쾌하며 천진난만한 곡이었다. 조슈아는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빙그레 웃었고, 티치엘도 루시안과 눈을 마주치며 함박미소를 지었다. 보리스에게도 놀랄만큼 자세한 영상이 보여 그가 미소 짓는 모습도 심심치않게 볼 수 있었다. 동요처럼 후렴구가 반복되는 구조인지 벌써 세 번째 후렴구였다. 이미 멜로디를 다 외워버린 조슈아는 가락을 흥얼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가사를 붙여 버렸다.
꼬마야 놀아라
어른이 되기 전에
맨몸과 맨 손으로
물고기를 잡아라
오후의 햇살과
모닥불과 웃음과
별과 노래와
함께 잠들어라
조슈아의 노래가 끝남과 동시에 막시민의 연주도 끝이 났다. 루시안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와! 이거 마법이지? 나 이거 듣자마자 보리스랑 옛날에 놀던 일 생각났어!"
"...나도."
의외로 보리스가 맞장구를 치자 루시안이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며 조슈아가 가볍게 말했다.
"그 금발머리 꼬마는 루시안이었나봐?"
루시안의 활기참이 연주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는지 다들 신이 나서 한동안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막시민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다가 세 번째 악보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연주회의 하이라이트였다. 조슈아가 오늘의 연주회를 위해 만든 단 하나의 곡. 제일 부담되고 짜증나는 곡이었던 지라 막시민은 다시 신중하게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었다. 관객들은 그런 진지한 모습에 잡담을 멈추고 연주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조슈아는 싱긋 웃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했다.
화려한 무대 위 주인공인 그대여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고
당신의 모든 것을 터뜨려
아름다운 재능을 마음껏 쏟아냈나요?
잠시, 아주 잠시 무대에서 내려와
티타임을 가져보는 건 어때요
향긋한 찻잎과 맛있는 과자와
함께 수다까지 떨어줄 친구들이 있답니다!
조슈아의 서곡을 막시민의 연주가 받았다. 빠르고 경쾌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주였다. 커다란 극장이 떠올랐다. 그 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쓴 귀부인, 고귀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 돈이 많은 상인, 다른 극장의 배우, 음식점의 급사와 의상실 직원들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모두 한 사람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다. 유명하고 아름다우며 무대에 대한 열정까지 고루 갖춘 완벽한 배우를 보기 위해 그들은 큰 돈을 지불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배우는 노래하고 춤췄다. 수많은 스포트라이트와 뜨거운 박수갈채, 끊이지 않는 커튼콜. 열기와 환호성으로 가득찬 무대가 막을 내리자 장면이 전환되었다.
일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배우는 이제 조용한 테라스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난간 밖으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숲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배우와 함께 티타임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은 여러명이었다. 안경을 쓴 소년,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 쾌활하고 순진한 소년, 하얀 치마를 단정히 차려입은 소녀, 그림처럼 조용하게 앉아있는 소년. 찻잎 우려낸 물이 조각같은 찻잔에 담기자 웃음꽃이 피어났다. 웃음꽃은 자라고 자라 넝쿨이 되어 아래까지 뻗어내려갔고, 넝쿨 사이로 어머니와 아버지와 누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를 닮은 인형과 사제와 긴 머리의 마법사와 개구리를 좋아하는 괴짜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친구들이었다. 넓어진 그의 세계였다. 다시 한 번 숲에 바람이 스치자,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연주가 끝났다.
"..."
연주가 남긴 여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막시민은 까다로운 악보를 음 하나 놓치지 않고 연주했고, 그 결과로 네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슈아는 이 악보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사실도 잊은 건지, 한동안 멜로디를 곱씹으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막시민이 바이올린의 현을 조절하는 사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와... 조슈아 멋있다..."
루시안이 제일 먼저 솔직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그 말에 보리스가 덧붙였다.
"정말 직접 만든건가? 놀라운데. 혹시 그 배우가..."
"응, 나야."
"혹시 노래까지 직접 만든거야? 대단하다! 막시민은 연주하고~ 조슈아는 노래하고~ 우리 이 연주회 매달 하면 안돼? 너무 좋다."
"매달 오만 엘소를 낼 셈이야, 루시안?"
조슈아가 키득거렸다. 흘끗 돌아보니 티치엘은 음악에 감동받았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막군, 어때? 할만 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막시민은 굳은 손가락을 탈탈 털어대더니 다시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었다. 그는 마지막 곡을 시작하려다 말고 잠깐 머뭇거렸다. 갈색 눈동자가 잠시 청회색 눈동자와 얽혔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네가 책임져라, 숯가마."
수수께끼같은 막시민의 당부에 루시안과 티치엘이 동시에 보리스를 쳐다보았지만 보리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을 뿐이었다. 조슈아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난 보리스 곡이 제일 기대되는데?"
네 사람의 눈이 다시 연주자에게 쏠리자 막시민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활대를 현 위에 얹었다. 보리스 곡은 악보만 보고 연습을 한 번도 안했던 지라 더 자신이 없었다. 이게 찬트라고 생각하니 함부로 연습했다간 무슨 사단이 날지 몰라 일부러 피해왔던 까닭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리스의 곡이 매우 짧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되지. 그는 네 소절짜리 신성찬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현이 몇 번 낑낑거렸다. 그리고 막시민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첫 음을 켰다.
"...!"
앞의 세 곡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마력이 강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한 음 한 음에 절절한 그리움과 회환, 짙은 상념이 묻어났다. 바위처럼 무겁고 겨울처럼 고독한 멜로디는 중후한 소용돌이가 되어 도토리 빌라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심장으로 날아갔다. 막시민까지 마력에 휩쓸려 활대를 놓칠 뻔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곧 태양이 나타났다. 태양은 차례차례 나타나 짙은 어둠을 걷어버리기 시작했다. 첫번째 태양은 호두가 되어 날아오더니 소년의 발치에 가득 쌓였다. 호두는 검이 되었고, 그를 지키는 가장 든든한 기사가 되었다. 두 번째 태양은 달빛을 머금은 하얀 머리카락이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소년의 가슴을 단단히 에워싸며 그에게 가장 튼튼한 갑옷이 되어주었다. 세번째 태양은 황금같은 노란색이었는데, 나비가 되어 그의 곁을 날아다니며 즐거움이 되어주었다. 잃어버린 웃음이 되어주었다. 웃음은 다짐이 되고, 다짐은 결심이 되어서 가장 아름다운 찬트가 울려퍼지고 난 뒤에는 그것들을 온전히 소년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소년은 곧 청년이 되었고, 태양에게 행운을 선물했다. 지금, 그 행운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
막시민이 갑자기 연주를 멈추었다. 그러나 마력은 멈추지 않고 계속 소용돌이쳤다. 조슈아가 놀라 고개를 들자 막시민이 조슈아에게 손짓했다.
"야, 이리 좀 와봐라."
조슈아가 다가가자 막시민은 악보를 넘겨주었고, 조슈아는 잠시 악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어 가만히 노래했다.
내 눈이 닿는 곳
그 너머 푸른 곶
긴 사래 끄는 파도
새나래 쳐 거닐리라
막시민의 연주와 조슈아의 노래는 마력 위에서 뛰놀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부숴버렸고, 소용돌이가 부서진 자리는 눈이 되었다. 루시안이 깜짝 놀라 흰 눈송이 하나를 손으로 잡자 그것은 초록색 클로버가 되었다. 루시안이 하는 양을 보고 있던 티치엘도 눈을 손으로 잡아내자 조슈아와 막시민도 하나씩 잡아냈다. 마지막으로 보리스까지 잡아내자 각자의 손에 담긴 클로버는 눈부신 초록빛 가루로 변하더니 번쩍, 하고 사라져버렸다.
"..."
노래와 함께 가락은 사라졌다. 이제 연주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들에게 마법이 걸린 것이다. 무슨 마법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불안해진 막시민이 보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마법이잖아."
모든 눈이 보리스에게 꽂혔다. 보리스는 친구들의 반응에 움찔했지만 곧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마지막 선물. 행운."
그 말을 조용히 곱씹어보던 조슈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가락을 탁, 튕겼다.
"태양에게 행운을 선물했었지? 우리가 그 마법을 나눠받은 거구나."
그 말을 듣고 저마다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루시안이 불쑥 자신의 손을 보리스에게로 내밀었다.
"이것 좀 봐."
루시안의 손바닥엔 황금빛 클로버 자국이 남아있었다. 보리스가 엷게 미소지었다. 보리스의 미소를 본 조슈아가 순간적으로 루시안에게 다가왔고, 그도 황금빛 자국을 볼 수 있었다.
"어? 루시안은 손바닥에 이상한 자국이 있네. 난 없는데."
"자국이라고? 그게 뭐냐?"
"무슨 소리야? 자국이라니?"
티치엘과 막시민도 몰려와서 루시안의 황금 클로버를 보았다. 루시안에게만 있는 자국이었다.
"이게 뭐야? 응? 왜 나만 있어?"
"행운이라잖아. 루시안 행운은 조금 더 반짝반짝 한가보다."
티치엘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막시민이 콧방귀를 뀌었다. 마법의 연주회는 행운을 잔뜩 가지고 나가며 끝이 났고, 조슈아와 티치엘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루시안은 아직도 연주회의 여운이 남았던지 거실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대고 있었다. 들었던 곡의 감상을 차례차례 말하던 그는 이윽고 보리스의 마지막 곡을 마구 물어보기 시작했다.
"호두는 뭐였어?"
"그런 건 말해줄 수가 없어, 루시안."
"음... 그럼 머리카락은 뭐야?"
"그것도..."
"노란 나비는?"
마지막 질문에 보리스가 또 미소지었고, 그 모습을 본 막시민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바보냐. 너잖냐, 병아리."
"응? 나?"
루시안은 잠시 멍하게 서있더니 씨익 웃었다.
"그런가? 어쨌든 나 오늘 연주회 너무 좋았어! 다음에는 막시민이 들고온 곡도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막시민, 우리 이거 다음달에도 하면 안 돼? 돈 두 배로 낼게!"
"...숯가마, 계약 잊었냐."
보리스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안, 넌 앞으로 한달동안 막시민한테 말 걸면 안돼."
"히잉... 알았어, 그럼 나 갈게! 막시민, 오늘 연주 잘 들었어! 안녕!"
루시안이 방 안으로 사라지자 보리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막시민 앞으로 와 말했다.
"고맙다. 좋은 연주였어."
"...별 말씀을."
보리스까지 방 안으로 사라지자 막시민은 벨벳 의자에 묻어놓다시피 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손바닥을 들어올려 보았다. 그곳엔 아직도 초록색 클로버 가루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행운이라..."
하늘에서 금화가 쏟아지는 행운이나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다운 생각을 하는 막시민이었다. 이윽고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바탕 편 후 방으로 들어갔다. 마법의 연주회가 열렸던 도토리 빌라 거실엔 행운의 클로버가루만 희미하게 떠돌아다녔다.
뱀발1. 으으... 소리는 글로 묘사하는게 아닌가보다... ㅋㅋㅋㅋㅋㅋ 부끄러우니 도망(
뱀발2. 시점이 란지에 편입 전이다보니 란지에가 통편집되는...;; 안타까운 상황이...;;; 다음 썰은 란지에도 넣는 걸로!!(는 다음 썰이 과연 있을까여.... 헉헉... ;_;;
뱀발3. 막군 연주.. 나도 듣고 싶다.. 8ㅁ8 넌 왜 차원 너머에 있니(쾅쾅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이올린 연주회 上 (0) | 2015.08.20 |
---|---|
나우보리 연성 (0) | 2015.08.14 |
[란클] 비 내리는 여름 밤, 동굴 속에서 +a (0) | 2015.08.14 |
네티 화원(花園) 합작/ 별꽃/ 도토리즈 (0) | 2015.08.14 |
쪽글(사약)/ 예프넨&에피비오노 (0) | 2015.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