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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연주회 上

*2014.1.13

*도토리즈 중심. 논커플링.

*데모닉 트리오가 모든 여행을 마치고 조슈아와 막시민이 다시 네냐플로 복귀할 때의 이야기

 

 



노을섬에서 아나로즈를 만나고 소원거울을 만들어 약속의 사람들을 모두 고향으로 보낸 후, 조슈아와 막시민은 미의 극치호를 타고 하이아칸으로 향했다. 비록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몇 안 되었지만 리체를 태운 이상 그녀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놓아야 했던 것이다. 물론 리체는 그럴 필요 없다며 사양하긴 했지만, 조슈아가 고개를 저었다.

"세자르 아저씨 말대로, 데려왔으니까, 책임지는 거야."

리체를 블루 코럴 섬에서 무사히 전송한 후 키를 어디로 돌려야할지 잠시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아무리 젊은 데모닉이라 해도 궤변가와 늙은 데모닉 모두를 이길 수는 없었다.

"물론 이 근처에 쥬스피앙 마법사가 살고 있다는 건 알지만 말야, 자, 봐라. 우리가 지금 배를 쥬스피앙 마법사한테 줘버리면 우린 네냐플까지 뭘 타고 가냐? 물론 마차를 타고 말을 타고 여관과 여관을 거쳐 국경을 넘어 머나먼 길을 '걸어서' 갈 순 있겠지. 하지만 난 지금이야말로 티치엘 없이 사두마차와 하인이 여럿 딸린 진짜 '여행'을 한다 해도 배를 줘버리고 그딴 생고생을 하기는 싫다 이거야. 왜냐고? 이유는 묻지마.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아니, 사실은 다 네 놈 때문이야. 자고로 여행이란 등 따시고 배부르게 다녀야 하는데 나는 네 놈 때문에 시체 여행, 거지 여행밖에 안 해봤잖냐! 그러니까 나의 여행다운 여행을 위해 이 배는 당연히 아노마라드로 가는 여행을 해야 해."

"조군, 이 늙은 할애비를 걸어서 켈티카까지 가게 할 참이냐?"

결국 쥬스피앙 마법사의 집 코앞에서 미의 극치호는 키를 돌려 아노마라드로 향했고, 세 도주자들은 무사히 숙녀의 호수에 내릴 수 있었다. 자체휴강이 시작된 지 정확히 2주 후였다.

그 날은 르노아의 날이었다.



 

[단편] 바이올린 연주회



 

"아아-. 조용하구만."

"쉬는 날이니까."

예상과 달리 아침 일찍 도착한 두 사람은 호수에서 히스파니에를 배웅한 후 어슬렁어슬렁 학원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배는 당연히 히스파니에가 가져갔다. 무슨 이유로든 쥬스피앙 마법사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막시민은 옳다구나, 하며 냉큼 히스파니에에게 배를 떠넘겼지만, 조슈아까지 동의한 것은 조금 의외였다. 막시민이 이죽댔다.

"전용 마차로라도 삼게?"

"아니야, 그런거!"

어차피 네냐플에 있어봤자 하등 쓸모없는 유랑극단선일 뿐이었다. 게다가 빌린 물건치곤 너무 오래, 그리고 자주 탔던지라 이젠 남의 것이라는 개념마저 가물가물해질 지경이었다. 카프리치오 바이올린을 훌륭하게 훔친 히스파니에라면 왠지 미의 극치호도 정당한 사유로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작은 할아버지에게 모든 뒷일을 맡긴 셈이 된 조슈아는 기분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막시민도 비슷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쥬스피앙 부녀가 안팎으로 우릴 감시하고 있는데 영감 손에 오래 있긴 힘들거다."

호숫가를 지나 정원 어귀에 도착하니 사람이 몇 명 보였다. 주로 식당에서 나와 포도원으로 향하는 것을 보니 연구를 위해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며 자신들의 허기를 인지한 두 소년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침이나 먹자."


식당은 한산했다. 늘 그렇듯, 모처럼 쉬는 날에 누가 일찍 일어나 굳이 아침을 챙겨 먹겠는가. 덕분에 오랜만에 꿀벌들 없이 쾌적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소공작은 신이 났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막시민은 아침부터 당당히 고기를 주문했고, 조슈아가 흘겨보든 말든 자리에 앉아 아무렇게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조슈아도 곧 풀이 가득한 식사를 받아 포크를 들려는 찰나, 식당 입구에 익숙한 머리카락의 소유자가 보였다.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보리스!"

말없이 사라졌다가 2주만에 나타난 주제에 조슈아는 꽤 해맑았다. 규칙적인 습관의 소유자답게 아침 일찍 일어났던 보리스는 갑자기 식당에 나타난 그들을 보고 잠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딱히 놀란 기색을 보이진 않았지만, 사실 너덜너덜한 행색을 한 두 사람이 텅 빈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하긴 했다. 보리스가 조슈아 맞은편에 앉아 밀죽과 귀리빵을 주문하고 얌전히 기다리는 동안, 막시민은 고기를 물어 뜯으며 보리스에게 대충 손을 흔들었다. 조슈아가 빙그레 웃었다.

"별로 안 놀라네? 우리 왔어."

"...응."

단순명료한 대답에 조슈아는 잠시 보리스의 표정을 살폈지만, 보리스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보리스의 식사도 날라져왔다. 막시민이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숯가마는 우리가 온 몸에 피칠갑을 두르고 나타나도 별로 안 놀랄 것 같다고. 그나저나 루시안 녀석은 어디갔냐? 그 녀석이 떨어지기도 하냐?"

"루시안은 자게 내버려뒀어."

"혹시 루시안이 우릴 찾진 않았어?"

"...엄청 찾았지."

조슈아는 루시안이 온 학원을 쏘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막시민은 그런 친구를 흘끔 보며 혀를 찰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조슈아는 곧 웃음을 그치고 보리스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네 덕분에 잘 다녀왔어. 참, 그리고 몇 가지 묻고 싶은 것도 생겼는데... 대답해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물어볼게."

"..."

보리스가 침묵을 지키든 말든 조슈아는 아랑곳 않고 품 속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리스 쪽으로 밀었다. 보리스의 입술이 엷게 씰룩이는 것을 날카롭게 포착해 낸 조슈아는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찬찬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거, 네가 한 거지?"

"말할 수 없어."

"그래, 네가 한 거구나."

"..."

왠지 심문에 말려든 것 같아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조슈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부인한다고 해도 상관 없어. 사실 네가 아니라고 말했어도 난 네가 한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너 말고는 이걸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

"그럼 왜 굳이 물어보는 거지?"

"음... 글쎄."

조슈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막시민은 그 옆에서 괜히 빈정거렸다.

"차라리 그냥 가나폴리 사람이라고 하라고. 그럼 믿어줄테니까."

"...아닌데."

"그래, 아닌건 아는데... 젠장, 그래도 가나폴리 사람이라고 하라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인간이 인형에 거울에 찬트까지 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진단 말이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그래, 필멸의 땅에 다녀왔다고? 알긴 아는데..."

막시민이 또 헛소리를 지껄일 기세라 조슈아가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럼 보리스, 넌 찬트를 부를 줄 아는 거구나."

막시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조슈아와 보리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그도 조슈아와 똑같은 추리를 해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지난번에 술집에서 조군 놈이 너한테 그랬었지. 네 목소리가 평범하지 않다고. 그런데 네가 찬트 악보를 뜯어고친 걸 보아하니 넌 분명히 찬트를 아는 모양이고, 그럼 결국 찬트로 노래 연습을 했다는 얘기가 되겠지. 젠장, 그러니까 그냥 가나폴리 사람 해라."

"대륙에는 찬트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댔어. 레오멘티스 교수도 '들어도 따라할 수 없는 것이 찬트'라고 말했고. 그런데 넌 도대체 그걸 어디서 어떻게 배운 거야?"

보리스가 약하게 한숨을 쉬며 대답을 하려던 찰나, 막시민이 말을 가로챘다.

"당연히 말할 수 없겠지, 이 비밀 투성이인 점잖은 숯가마야!"

"...막군, 나 몰래 술이라도 마셨어?"

조슈아는 막시민의 반응에 키득거리면서도 점잖게 그를 제지했다. 그리곤 생각에 잠겼다.

"들어도 따라할 수 없다는 건, 독학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니까 결국 찬트도 처음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단 얘기겠지. 그 '누군가'란 스승이 될 확률이 높고. 대륙엔 더 이상 찬트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여기 내 눈앞에 있으니 그 정의는 수정되어야 하겠지."

"그럼 조군 넌 보리스에게 찬트를 가르친 사람이 대륙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럴지도. 어쨌든 전승자가 여기 한 명 있잖아."

"흐음... 그 무시무시한 아주머니 같은 사람이 대륙 어딘가에 또 있다고 생각하니 역시 등골이 오싹해지는데. 아니, 근데 그런 사람이 있는데도 쥬스피앙 마법사나 레오멘티스 교수가 모른다는게 말이 되냐? 그런 가나폴리 전통의 힘을 갖고 있다면 어찌됐든 마법사 중 누군가는 알아야 하는거 아냐?"

"음... 당연히 없을거라고 생각해서 찾아보지 않았을 수도 있지. 마법사라고 세상 모든 지식을 알고 있는 건 아니잖아."

당사자를 앞에 앉혀두고 저들끼리 떠들고 있던 조슈아와 막시민이었다. 보리스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두고 조용히 식사했다.

"아, 그러고보니 숯가마 저 자식, 검술도 요상하잖아. 검술 스승이 찬트 스승인 건 아닐까?"

막시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셋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놀랍게도, 조슈아와 막시민은 보리스의 얼굴에 엷게 피어오른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하나둘씩 식기구를 들었고,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냅킨을 정리하는데 보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 악보는 어디서 구한거지?"

"어... 유령선에서 건져왔다고 하면... 믿을래?"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이 미친 놈아."

보리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답게 딱히 뭐라 대꾸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덧붙였다.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던데. 조심하는게 좋을 거야."

그 말에 막시민은 물론 조슈아까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고? 그럼 넌 이게 무슨 곡인지 알고 있었다는 거냐?"

"원래 아는 곡이야?"

"...아니."

보리스의 부인에 두 사람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원래 알던 곡이 아니면 도대체 어떻게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필사적으로 생각하던 조슈아는 문득 당연한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렇지. 창작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단지 음악 그 자체의 몇 안되는 규칙과 작곡가의 영감만이 존재할 뿐이야. 그럼 그 말은, 네가 찬트를 직접 작곡했다는 거야? 이 몇 안되는 소절을 가지고?"

"뭐라고? '찬트'를 '작곡'했다고?"

막시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가나폴리 전통의 힘이라고. 마력이 담긴 노래란 말이야. 동네 애들이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 노래도 아니고, 조군 네 놈이 막스 카르디 시절에 수없이 불러제꼈던 노래도 아니고, 칼라이소 시절 사나흘만에 뚝딱뚝딱 만들어내던 그런 미친... 아니 평범한 노래도 아니라고."

두 사람은 미간을 마구 찌푸리며 보리스를 쳐다보았지만, 보리스는 그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을 뿐이었다.

"말할 수 없어."

"...조군, 나 저 자식 멱살 한 번만 잡아도 되냐."

"그러다가 보리스의 주먹에 나가떨어지면 나도 못 도와줘, 막군."

보리스는 두 사람이 나누는 헛소리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효과를 본 거지?"

"...?"

"매개체가 없으니 불가능했을 텐데."

매개체인 '노래'를 두 사람이 모를 것이라 생각했기에 저지른 일이었다. 악보를 볼 줄도 모르거니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따라부른다 해도 불가능한 것이 바로 찬트였다. 따라서 당연히 효과가 발휘될 수 없었고, 그럼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기에 고쳐준 악보였다. 아니, 사실은 조슈아와 막시민이 악보를 붙들고 낑낑대는 것을 잠자코 보고 있다가 새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고쳐준 것이긴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저렇게 얘기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 찬트가 나름의 효과를 발휘한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악보를 만들면서 이 곡이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특수한 곡인 것 같다고 짐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악보 자체에 깃들인 미약한 힘이 그런 큰 일을 만들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아까 한마디 충고한 것은 단지 마법을 배우지 않겠다던 조슈아에게 찬트 악보에 깃들인 약한 마력이 무언가 영향을 줄까 염려되어 그리한 것 뿐이었다.

"아, 그건 말이지..."

조슈아는 막시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막시민은 조슈아의 손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고 있다가 결국 건네주고 말았다. 잠시 후, 조슈아의 손엔 금방이라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만 같은 낡아빠진 바이올린이 쥐어져 있었다. 조슈아는 바이올린은 식탁에 올려놓았다.

"카프리치오. 신성찬트를 연주하는 바이올린이야."

보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조슈아는 보리스의 표정 변화를 살펴보더니 굉장히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보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식사도 다 마쳤고, 떠나려면 충분히 떠날 수도 있었지만 눈 앞에 있는 이 바이올린이 신성찬트를 연주할 수 있다니 호기심이 더 앞섰다. 오랜만에 소년의 마음이 된 보리스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걸로 연주한건가?"

"응."

"...네가?"

조슈아는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아니고."

보리스는 더 믿을 수 없다는 듯 막시민을 쳐다보았다.

"...물론 내가 이런거하고 거리가 먼 놈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쳐다볼 건 없잖아."

"...놀라운데."

막시민은 더 할 말이 없는 듯,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막시민은 이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야."

조슈아의 설명에 보리스는 신기한 듯 다시 막시민을 쳐다보았다. 막시민은 매우 당황했다.

"아니, 영감은 왜 쏙 빼놓는데? 그리고 왜 꼭 설명을 그딴 식으로 하냐고! 그러니까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잖냐!"

"대단한 사람 맞는데."

조슈아가 씨익 웃자 막심니이 드물게 말문이 막혀 벙찐 상태가 되었다. 그 사이 보리스는 찬트 악보와 바이올린을 번갈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나폴리의 마법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궁무진했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도 찬트의 마력을 개방할 수 있다니. 왠지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막시민에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막시민은 그의 옛 스승보다 더 게으른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문득 막시민은 이 바이올린을 누구에게 배운건지 궁금해졌다.

"스승이 있었던 건가?"

"..."

막시민은 매우 귀찮은 듯 양 미간을 마구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결국 조슈아가 대답했다.

"나한테 작은 할아버지가 있거든. 막군이 할아버지하고 친구인데... 할아버지가.. 음, 어떤 경위로 저 바이올린을 손에 넣으셨어. 그리고 막군한테 연주법을 가르치고 저걸 넘겨주셨지."

"그럼, 그 분은 독학?"

보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보자 조슈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잠시 눈알을 굴렸지만,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신기한데."

보리스가 이렇듯 자신의 감상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곧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산한 식당을 빠져나갔다. 북탑 2층 안쪽으로 당연히 따라오는 조슈아를 보리스가 물끄러미 쳐다보았지만, 조슈아는 응? 하면서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보리스는 제발 루시안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빌며 빌라 문을 열었다. 조슈아가 탄성을 질렀다.

"아! 여긴 그대로네."

"당연히 그대로지. 또 잼 폭탄이라도 맞았을까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시민도 빌라로 돌아온 것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막시민은 매우 피곤했고, 배에서 실컷 잤다 하더라도 아직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부족한 잠을 보충할 시간이 필요했다. 조슈아가 빌라에 들어와서 수다를 늘어놓을 태세든 아니든 그에 관계없이 막시민은 가져온 짐 꾸러미와 바이올린 뭉치를 방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손을 한 번 흔들어주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보리스와 둘만 남게 된 조슈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가벼렀네."

"..."

조슈아는 다마스크 방석이 깔린 의자를 하나 꺼내 앉았다. 그리곤 마치 자비로운 왕처럼 한 쪽 팔을 내어 뻗으며 보리스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앉아."

"..."

"할 말이 있지 않아?"

이 빌라에 사는 것도 아니면서 주인보다 더 주인같아 보이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보리스는 별 대꾸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씩 웃었다.

"들어보고 싶지? 연주."

"..."

"왜 그래, 나도 처음엔 들려달라고 막군을 엄청 졸랐었어. 그러다가 뒤통수 한 대 얻어맞고 끝났지만."

"...그럼 나는 더더욱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그러니까 우리 거래를 하자."

보리스가 의아한 듯 조슈아를 쳐다보았다. 조슈아는 매우 열성적이었다.

"물론 안될 수도 있어. 사실 이번 여행이 끝났을 때 막군이 앞으로 백년동안 바이올린은 켜지 않겠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거든. 그래서 별로 자신은 없는데... 뭐, 대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조슈아는 말을 흐리며 루시안의 방문을 힐끔거렸다. 보리스는 그제야 아뿔싸, 싶었지만 조슈아를 말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티치엘도 도와줄거야. 말은 안하지만 티치엘도 막군 연주를 듣고 싶어하거든. 어쨌든 머릿수는 충분하다 이거야. 이 기회에 나도 들어볼 수 있으니 좋겠지."

"...조건은?"

보리스의 청회색 눈동자와 조슈아의 까만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보리스는 사뭇 진지했지만 조슈아는 마치 장난을 계획중인 꼬마아이처럼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보리스는 왠지 모르겠지만 루시안이 생각났다.  

"내가 포도원에 가서 찬트 악보를 몇 개 찾아올게. 넌 그걸 복원해주면 돼."

"그걸 막시민이 연주하게 한다고?"

"응."

"..."

"물론 다른 평범한 곡들에 섞어서."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었지만 구미가 당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리스는 참가 여부를 골똘히 궁리해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득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자신이 그렇게 찬트를 듣고 싶었던가. 눈 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섬의 겨울... 추위가 강해질수록 더욱 생각나는 누군가였다. 또한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이윽고 보리스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부터 막시민의 수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