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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보리 연성

*2014.3.29

*룬의아이들 윈터러 5권 p.74-77을 기반으로 





데스포이나의 집은 온통 흰 색이었다. 천장부터 드리워진 커튼, 정갈히 개켜진 사제복, 차곡차곡 쌓인 수건과 그 옆에 놓여있는 대리석 물그릇까지 전부 다. 다프넨은 섬에서 대리석은 도대체 어떻게 구한걸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었다. 공회당에서 급하게 돌아온 듯 데시 사제의 머리카락과 옷 매무새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옆에 선 이솔렛의 조금은 상기된 듯한, 그러나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다프넨은 문득 궁금해졌다. 나우플리온은, 나우플리온은 어디 있는가?

"돌아왔구나... 달여왕이시여, 고맙습니다."

지팡이의 사제는 짧게 기도를 드린 후 여러 마법을 사용하여 다프넨에게 무언가 이상이 없는지를 살폈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기에 검사는 금방 끝났고, 다프넨은 얼른 나우플리온의 행방을 물었다. 집에 있을 거라는 데시 사제의 말에 그는 인사를 드린 후 바로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몸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마음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절벽에서 발을 잘못 디딘 후 분명히 계곡 아래로 떨어져 죽었어야 했을 자신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마 윈터러의 힘... 유령들과 보냈던 시간이 무색할만큼 꺼림칙했다. 윈터러의 의지는, 결코 선한 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절대자가 필요한 검이었다. 힘에 복종하는 검... 하지만 그는 검을 지배할 수 없었고, 요령 좋게 그 검을 다룰 힘도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이기에 더욱 매여있었다. 차라리 형의 유언이 없었더라면, 저 검을 버려두고 형을 지킬 수 있었더라면, 아니, 애초에 진네만 가에 저 검이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형과 함께 있을 수 있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코를 문에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리리오페가 가져왔다던, 이제는 다 말라 비틀어진 화환이 문 중앙에 걸려 있었다. 다프넨은 그것을 떼어 버린 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 올리고, 허름한 옷 한 벌을 대충 걸쳐 입었다. 무엇을 하는지 다프넨에게서 뒤돌아 있었으나 평소 그의 실력으로 보아 대문 열리는 소리를 못 들을리 없을, 그의 하나뿐인 스승. 세상에서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산책은 잘 했냐?"

아아, 윈터러를 버렸다면, 윈터러가 그에게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나우플리온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혼란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새로운 만족감이었다. 형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고, 형을 의지하듯 그를 의지한다. 윈터러가 그를 원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우플리온과 함께라면, 다프넨은 언제든 윈터러와 싸울 수 있었다. 윈터러가 그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어하든 알 필요도 없었다. 나우플리온에 이르면 윈터러는 그저 나우플리온을 만나게 해준 매개체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다프넨은 가슴이 벅차오른 나머지 그에게 달려가 목을 와락 껴안았다. 봄풀 내음이 훌쩍 끼쳐왔다.

"손 벨 뻔했다, 이 녀석아."

나우플리온은 들고 있던 단도를 숫돌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다프넨은 소일거리를 내려놓은 그를 아직 놔줄 생각이 없었다. 목을 더 단단히 끌어안고, 그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년의 미숙한 힘이 우악스런 사내에게 전해졌다. 나우플리온은 피식 웃으며 수건을 폈다.

"산책 잘 했네요. 벌써 완연한 봄이던데요."

다프넨의 목소리가 웅얼웅얼 흘러나왔다.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터라 숫돌을 수건에 감아넣는 나우플리온의 움직임이 다프넨에게 전부 전해졌다. 어깨가 올라가고, 다시 내려온다. 한차례 회전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문득 다프넨은 그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뚝처럼 콱 박혀서, 그의 주변에만 있고 싶다.

"인간을 기다려주는 건 같은 인간밖에 없지."

그가 좋다.

"인간이라고 시간을 거스르는 건 아니잖아요?"

이런 시시한 대화도 그가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예외 없이 늙은 얼굴을 보여줘서 안도감과 만족감을 조성하지."

그와 함께 있고 싶다.

"그게 기다리는 거에요? 기다린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은데."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팔을 풀게 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그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프넨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 본 나우플리온의 얼굴에 잔주름이 무수히 피어있었다.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걱정을 끼쳤던가. 얼마나 애타게 만들었던가, 얼마나 힘들게 했던가. 그를 신뢰해서 이곳까지 따라왔건만 그는 여전히 나우플리온에게 짐이었다. 성장 중인 소년이 청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곁에 있을 뿐. 그저 그 뿐.

"기다리지 않는 녀석들도 있지. 실버스컬 원정단은 이미 한참 전에 출발했거든."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나우플리온은 부러 가벼운 어조로 농담을 던졌다. 그에게 공정하지 못한 짐을 지웠다. 혈육도 아닌 그에게 혈육이 할 수 있는 걱정보다 더한 염려를 끼쳤다. 그것이 너무도 미안하여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차라리 그의 말을 무조건 따를 수 있는 착한 아이였다면 좋았을 것을.

"왜 전 당신의 말을 무작정 따라도 좋은... 착한 어린아이가 아닐까요?"

나우플리온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프넨도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그의 소년에게 대답했다.

"모두 네 삶이니까. 스스로 포기하거나 승리, 또는 패배, 어느 쪽으로든 해결되는 수밖에 없으니까. 나 역시 내 삶의 전투들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스승다운 말이 하나하나 귓가로 날아들었다. 이미 다 알고 있던 것들인데, 자신의 짐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져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열두살 그 때부터 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 그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우플리온에게 확인받았다. 의미를 되짚어보기도 전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받아 올랐다.

그러자 그의 손이 다가왔다. 나우플리온은 이미 다 안다는 듯,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다프넨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다프넨은 알 수 있었다. 청년 또한 성장 중인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저 곁에 있을 뿐, 그저 그 뿐. 그러나 다프넨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은 아마, 나우플리온에게도 동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