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지클로 엽편
*2014.7.28
*네티 썰게에서 본 첸라지님의 썰을 기반으로: 진단메이커 였습니다->란지클로의 소재 멘트는 '잠깐 쉬는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키워드는 연정이야. 애뜻한 느낌으로 연성해 연성
[출처] ([룬의아이들 팬카페] 네냐플의 티타임) |작성자 첸라지
*전에 썼던 란클과 연결이 되는 이야기입니다(아마도)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든다. 열어둔 창 너머로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모슬린 커튼에 비치는 주홍 햇살은 이제 노을이었다. 저녁 노을빛은 마치 어린 아이의 손길처럼 사뿐히 가라앉아 방 안을 따스히 더듬었다. 탁자 위 놓인 작은 찻잔에도 한 움큼, 바닥에 깔린 다마스크 양탄자에도 한 움큼, 그 곁에 놓인 실내용 슬리퍼에도 한 움큼 비쳐든 노을은 그 위로 놓인 흰 침대보에도 성큼 올라 앉았다. 그리고, 침대엔 그림처럼 누워있는 여인.
전쟁 때 입은 상처로 칩거하며 휴식 중인 공녀였다. 그 모습에 란지에는 당황했다. 동맹 협정과 관련하여 잠시 의논할 사항이 있어 공녀를 찾았는데, 이렇게 자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안주인이 곤한 잠을 청하는 줄도 모르는 하녀에게 불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자는 사람을 깨우자니 그것도 무례이고, 그렇다고 이대로 방을 나가자니 공녀의 숙면도 몰랐던 하녀 때문에 성이 시끄러워질까 저어되어 내키지 않았다. 가능하면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나가고 싶었다.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피해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란지에는 방 한 가운데에 우뚝 서서 가만히 흰 침대보만 바라보았다. 아니, 공녀를 바라보았다. 침대 발판 너머로 보이는 클로에의 잠든 얼굴. 주홍빛 노을빛을 머금은 침대보 위엔 클로에의 탐스러운 금발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길게, 허리까지 이어지는 머리칼. 금빛과 주홍빛이 한데 얽혀 잠시 눈 앞이 어지러웠다.
아이처럼 눈을 감고 곤히 잠들어있는 공녀의 얼굴이 보였다. 살짝 감긴 눈가엔 긴 속눈썹이 내려 앉아 그늘을 드리웠고, 그 아래로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란지에는 저도 모르게 발을 떼어 가까이 다가갔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불도 덮지 않고 실내복 차림 그대로 새우잠을 자고 있을까. 허리는 살짝 굽어있고 시선은 측면을 향해 있었다. 실내용 양말도 벗어놓고 공녀는 맨발이었다. 빛 한 번 받지 않은 듯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흰 발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란지에는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저녁 바람이 선선하긴 해도 자고 있는 사람에겐 춥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저체온에 빠졌었던 공녀인지라 란지에는 제 신경이 한층 날카로워진 것을 느꼈다. 창문을 닫은 후 침대가로 돌아와 그 끝에 살짝 걸터 앉았다. 일련의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 어떤 무례도 느낄 수 없었다.
잠든 클로에의 얼굴은 늘 그렇듯 인형같은 미모를 발하고 있었다. 상처입어 목숨이 경각에 놓였던 전의 모습과는 달리 오직 고요하고 평안하여 란지에는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금빛 눈썹, 살짝 감은 눈, 작고 오똑하게 서있는 코, 약간 벌어진 입술과 갸름한 턱선, 그 아래로 이어지는 흰 목덜미와 아담한 어깨, 쭉 내뻗은 팔, 작은 손과 그 끝에 맺힌 하얀 손톱. 공녀의 모든 것은 다시 완벽해져 있었다. 공녀답게, 혹은 폰티나답게. 란지에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서야 비로소 늘 봐왔던 클로에의 모습이다.
클로에의 흰 얼굴에 주홍 햇살이 무수히 내려앉았다. 그 비현실적인 따뜻함에 란지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클로에의 뺨을 만졌다. 온기가 느껴진다. 손에 와닿는 느낌이, 그 감각과 촉감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아기 피부처럼 보송하고 갓난아기가 입은 베냇저고리처럼 몽실하다. 주홍 노을 빛에 슬며시 드러난 그녀의 홍조를 생각 없이 쓰다듬던 란지에는 곧 바람에 날린 듯한 금빛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그녀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침대보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그녀의 금발을 가지런히 모아 보았다. 머리카락은 가볍고 가늘었으며 풍성했다.
그는 잠든 공녀의 얼굴을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땅거미 지는 시간 우연히 찾아든 공녀의 방. 뜻밖의 실수로 자고 있는 클로에를 보게 되어 잠시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글쎄, 뭔가 평온한 느낌이라 손해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이런 고요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드물게 란지에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잠깐 쉬는것도 나쁘지는 않겠지."